▒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는 개미들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합성해 개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적 지식으로 보면 이 같은 대화는 인간뿐만 아니라 미생물, 곤충, 식물 등 모든 생물 종(種)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이들은 때로 소리로, 때로는 냄새로 동종(同種) 혹은 이종(異種)의 개체들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특히 이종 개체들과의 대화는 각 생물들이 동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심해 물고기나 오징어를 보면 눈이나 아가미 등에서 빛이 난다. 이 빛의 근원은 뭘까.

미국 코넬대학의 미생물학과 스테판 와이난스 교수는 이 같은 심해어류의 발광(發光) 현상을 연구, 이들에게서 보여 지는 빛이 세균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알아냈다.
기관 내부에 살고 있는 세균이 ‘luxAB’라는 유전자를 작동시켜 빛을 만들어 내게 한다는 것.

하지만 특이한 사실은 이 세균들이 항상 luxAB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숫자(밀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될 때만 그 같은 동작을 한다는 점이었다.

이유를 찾지 못해 애를 태웠던 와이난스 교수는 변호사였던 매제에게 이 난제를 토로했는데, 그는 이 재미있는 현상을 ‘정족수 인식(quorum sensing)’이라는 법률용어로 규정했다.

정확한 작동 시스템은 알 수 없지만 아군의 수가 적으면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가 특정 숫자가 넘어서야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는 세균의 특성을 빗댄 것이었다.(정족수 인식은 과학 분야에 사용된 최초의 법률용어다.)

그렇다면 세균들은 왜 이런 메커니즘을 갖고 있고,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서로의 숫자를 파악하는 것일까.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세균들이 ‘아실 호모세린 락톤(acyl homoserine lactone)’이라는 화합물을 분비, 개체 수를 인식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이 화합물의 경우 바닷물에서 서식하는 세균들은 물론 토양이나 사람 몸속에 살고 있는 세균들까지 화학적으로 동일한 물질을 분비한다는 점도 밝혀졌다.

이후 세균이 왜 이 물질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고, 동·식물과의 상호작용을 위한 것이 아닐까하는 분석에 도달했다. 개체 수 인식이 가능한 세균들 대부분이 고등생물에게 병을 일으키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사람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들은 세균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저항성 반응들이 아주 잘 발달돼 있다. 다시 말하면 미세한 세균 활동에도 즉각 반응해 초기에 세균 감염을 막는다는 뜻이다.

세균들은 이처럼 잘 발달된 동·식물의 저항성 반응을 피해 자신들의 목적(질병 유발)을 달성하고자 상대를 일거에 무력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정체를 숨긴 채 묵묵히 기다린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항생제의 내성을 유발하는 요소로 알려진 세균들의 생체막(biofilm) 형성에 이 정족수 인식 기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특히 생체막 형성의 경우에는 한 종류의 세균이 아닌 여러 종의 세균들이 서로 대화를 하면서 외부에서 주입된 항생제가 자신들에게 다가올 수 없도록 막을 만들고, 그 내부에서 숫자를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식물의 대화를 방해하라

인류가 미생물, 특히 세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들이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위 ‘병’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이 이들 미생물의 작용 때문이라는 사실이 파스퇴르 등에 의해 밝혀지면서 관련 연구가 본격화된 것.

이 과정에서 동·식물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미생물(병원균)들은 애초부터 그 같은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언제 어떻게 병원균으로 변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최근 생명공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유전자를 해독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유전체의 크기가 작은 세균의 경우 이미 100종 이상의 유전체 해독이 완료된 상태며 이를 토대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 기법을 활용, 인공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연구까지 진행 중이다.

이 유전체 정보를 분석해 보면 미생물들이 자연계에서 살다가 식물이나 동물을 만나면서 병원균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세균이 숙주의 저항성을 이겨내고 질병을 일으키는 능력을 ‘병원성(pathogenecity)’이라고 하는데, 이 병원성의 섬(pathogenecity island)이라고 불리는 부분에서는 원래는 없었지만 다른 생명체로부터 전해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유전자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세균들은 외부에서 유전자를 쉽게 받아들이는 구조로 발전돼 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병원균의 유전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바로 제3유형 분비체계(type III secretion system, TTSS)다.

다소 우스운 이름의 이 TTSS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동·식물(기주), 특히 식물의 대화를 방해하거나 왜곡하는 기능을 하는 단백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TTSS가 분비하는 이 단백질은 세균 스스로 만들어낸 일종의 빨대를 통해 기주의 세포벽을 뚫고 세포 내부로 주입된다.

1만분의 1 c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세균이 자기 몸길이의 수 십 배에 달하는 빨대를 제작, 자신의 세포 내부에서 기주 세포의 내부까지 통로를 구축해 특정 단백질을 집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주입된 단백질을 작동체(effector)라고 하는데, 이들은 과연 무슨 일을 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대다수 기주(동·식물)는 병원균에 대해 저항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은 그 병에 관련된 저항성 유전자의 활동이 병원균 침입 이후 이뤄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적들의 대화는 차단하는 것이 세균의 생존방법이다.


반면 병원균의 공격 이전에 활동을 시작하는 경우에는 저항성을 갖춰 병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가 면역력 강화를 위해 맞는 백신도 힘을 약화시킨 병원균을 인위적으로 투입, 인체가 사전에 그 병원균에 대한 저항성을 갖추도록 함으로서 병을 막는 것이다.

어쨌든 이 때문에 병원균의 입장에선 자신이 생존하려면 동·식물의 저항성 유전자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야만 한다.

그런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균이 기주의 저항성 유전자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 기주의 저항성 반응은 세포 내에서 일어나지만 병원균은 기주의 세포벽 밖에 존재하는 탓이다.

세포벽을 뚫고 통로를 구축하는 세균의 빨대는 바로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개발해 낸 생존방법의 하나인 셈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세균이 주입하는 단백질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20~30종으로서 최근 이 단백질들의 기능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작용이 기주의 저항성과 관련된 단백질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개체 수 인식 능력에 더해 TTSS가 강력하게 조절되고 있는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이 평범한(?) 병원균들에 비해 훨씬 치명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자면 세균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적(敵)에 해당하는 기주의 저항성 작동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다.

게다가 저항성 확보에 가장 중요한 단백질의 작용을 알아내 이를 무력화시키는 방법까지 확보했다. 자신은 끊임없이 대화(개체 수 인식)하고 적들의 대화(저항성 유전자 작동)는 차단하는 것이 이들의 생존법인 셈이다.


以夷制夷 전략으로 맞서는 식물

그러면 식물들은 외부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하고만 있을까. 물론 아니다. 식물들도 동종 혹은 이종 간의 대화를 통해 초식 곤충과 같은 적들의 공격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멕시코, 말레이시아 등지의 아열대 지방에 서식하는 아카시아 나무는 가지와 줄기가 맞닿은 부분에 당분이 다량 함유된 물질을 분비하는 EFN(extrafloral nectary)이라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독일 학자인 마틴 하일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EFN이 당분 성분을 분비하는 목적은 개미를 유인하기 위해서다.

아카시아 나무가 개미를 끌어들여 얻고자 하는 이득은 하나다. 자신을 공격하는 초식 곤충을 섬멸하기 위함이다.

실제 자연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곤충들이 존재하며, 이 중에는 식물을 먹는 곤충과 곤충을 먹는 곤충들이 있다.

이런 곤충의 먹이사슬을 잘 이해한 아카시아는 초식 곤충의 공격을 받았을 때 EFN에서 설탕 성분을 분비해 육식 곤충인 개미를 유인하는 것이다.

물론 개미는 아카시아의 목적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직 설탕을 얻기 위해 나무에 오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초식 곤충들을 먹잇감으로 잡아버리기 때문에 결국 아카시아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게 된다.

즉 이 아카시아 나무는 적을 이용해 또 다른 적을 공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존전략으로 삼은 것이다.

이이제이를 활용, 식물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이동성 문제를 해결한 좀 더 발전된 형태의 대화도 있다.

식물은 씨가 한번 땅에 떨어져 발아를 해서 뿌리를 박으면 죽을 때까지 한 자리에서 살아야 한다.

이때 초식 곤충 한 마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을 발견했다면, 그리고 주위에 비슷한 식물이 많다면 머지않아 수많은 곤충들의 공격을 감내해야 한다.
바로 이 때 식물들은 또 다른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한다.

곤충이 자기 잎을 갉아 먹을 때 식물은 메틸 자스모네이트(methyl jasmonate), 살리실산 메틸(methyl salicylate) 등 자스민 향과 비슷한 향기를 외부로 날려 보낸다.

이 냄새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개미와 같은 육식 곤충을 유인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주위에 있는 식물들에게 자신이 공격당하고 있음을 알려 미리 준비토록 하는 경고신호로 작용한다.

실제 이 물질을 식물체에 바르면 초식 곤충은 이전까지 잘 먹던 식물 잎을 버려두고 다른 식물로 옮기는 회피현상을 보이고 소화능력도 떨어져 생장에 지장을 받는다. 식물이 곤충에 대한 저항성 반응을 작동한 것이다.

유럽의 한 옥수수 품종도 이와 유사한 전략으로 자신의 뿌리를 먹고 성장하는 곤충의 유충들을 물리친다.

이는 미국의 옥수수들은 유충 피해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유럽의 옥수수는 별다른 피해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과학자들에 의해 최근 밝혀졌다.

10년여의 다각적인 연구 끝에 유럽의 옥수수 품종들이 뿌리에서 특이한 물질을 분비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 이 물질은 유충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만 분비되는 것으로 유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유충을 잡아먹는 ‘곤충 기생성 선충’을 유인, 유충을 제거한다.

실제 이 물질만 분리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뿌린 결과 선충들이 그 부분으로 격렬하게 모이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이러한 식물의 이이제이 전략을 통틀어 간접적 방어(indirect defense)라고 말한다.

이처럼 미생물-미생물, 미생물-식물, 식물-곤충들 사이에는 다양한 언어 교류와 함께 서로를 속이고 속는 긴박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흔히 자연계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이 ‘균형’이라고 말한다. 자연계는 기본적으로 한 종류의 종이 지나치게 다수를 차지하는 독점 현상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예외가 바로 인간이다.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자연계를 바라보면 이들 미물(微物)들 사이에 벌어지는 언어의 원리와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자연이 서로 균형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이해하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파퓰러사이언스, 007. 11 기사
Posted by TopA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