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 정조대의 역작품인 수원화성에 담긴 과학의 비밀을 살표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대 역작품으로 총 길이 5.7킬로미터, 면적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정조는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院)으로 옮기고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 넓은 기슭으로 이전했다.


○ 정조의 수원 화성의 건립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우며,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수원부는 딱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한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시킬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에게 맡겼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는데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같은 젊은 피를 수혈하여 종전과 차원이 다른 계획에 따라 건설했기 때문이다.



○ 새로운 개념의 성, 수원 화성

정약용은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화되도록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산성(平山城) 형태를 기본으로 했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 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따로 두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망루는 물론 총안(銃眼), 즉 총구멍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성곽의 용도가 다양했다.

특히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서 축성하였으며 제반 시설물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도록 배치했다.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두었으며 맞은편 높은 곳에 외부와의 통신시설인 봉수대를 벽돌로 만들어 세웠다. 화성 남북 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 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 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 등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십자로 주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은 것이다.


○ 수원 화성을 쌓은 첨단 기술


수원 화성이 초고속으로 완공될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이 당대의 최첨단 기자재를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다. 거중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고정 도르래만 사용하지 않고 움직도르래를 도입하여 복합 도르래를 구성한 것이다. 고정 도르래는 물건의 중량에 해당하는 힘을 주어야만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지만, 움직도르래가 1개 있으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다. 사용하는 움직도르래가 1개 늘어날 때마다 필요한 힘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바로 이 원리를 정약용이 이용한 것이다. 거중기 덕분에 화성을 건설하는 동안 인력을 아끼고 무거운 물체를 수월하게 다루어서 사고율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모두 11대였는데, 작업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고 한다.

정약용이 화성을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은 화성 성벽과 여장(성의 담) 사이에 검은색 벽돌이 끼어 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생김새가 눈썹 같다고 해서 눈썹돌 또는 미석(楣石)이라고 부른다. 미석을 성벽과 여장 사이에 끼워놓은 이유는 물질이 상태가 변화할 때 부피가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벽의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든 채 얼어버리면 얼음의 부피가 팽창하는 힘으로 성벽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미석을 끼워놓으면 비나 눈이 와도 물이 성벽으로 스며들어 가지 않고 미석을 타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화성에 숨은 과학 원리는 더 있다. 화성의 성벽을 자세히 보면 전체 형태가 구불구불하다.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하여 아치를 만들면 더욱 견고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벽의 허리를 잘록하게 쌓음으로써 돌과 돌 사이가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적병이 성벽을 쉽게 타고 오를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완벽한 아치 모양이 아닌데, 이는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재래식 기법에 익숙한 석공들이 정약용이 애초 의도한 설계 의도를 모르고 위로 가면서 돌을 밖으로 내밀어 쌓는다면 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화성의 성벽에는 이런 특징 말고도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바로 성벽의 높이가 다른 성들에 비해 평균 4m로 비교적 낮은 것인데, 왜 정약용은 제2의 도성이 될 화성의 성벽을 이렇게 낮게 만든 것일까? 이는 당시의 전쟁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정조가 화성 천도를 구상하던 18세기 중후반에는 전쟁의 양상이 병사들이 성을 타고 넘어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화포로 성벽을 쏴 무너뜨려 점령하는 형태였다. 따라서 성벽을 높게 쌓아 대포의 표적이 되기보다 좀 낮더라도 대포를 맞더라도 견딜 수 있게 높이를 낮춘 것이다.

성벽의 재료도 기존 성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 성들이 자연석이나 직육면체로 다듬은 화강암을 주요 재료로 쌓았다면 화성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로도 성을 쌓았다.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대포의 포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화강암은 그 자체로 강도는 매우 강하나 돌과 돌의 이음새가 딱 들어맞지 않아 화포 공격과 같은 외부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지거나 빠질 수 있다. 이에 반해 벽돌은 벽돌 자체로는 강하지 않지만, 벽돌과 석회로 벽을 쌓고 그 벽 안에 흙을 채우면 화포의 강한 공격에도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처럼 수원화성에는 거중기라는 당시의 최첨단 기기와 전쟁의 양상까지 고려해 제작된 첨단 건축물이었다. 수원화성의 뛰어남은 이런 첨단 건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화성을 지으면서 성의 형태는 물론 성을 쌓는 방법과 재료까지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성을 쌓으면서 만들었던 돌의 크기나 돌을 깎는 방법, 또 벽돌을 만드는 방법과 가마에서 굽는 방법 등 화성을 짓는 모든 것을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글과 그림으로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로 남겼다. 이는 화성을 잘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성의 보수나 관리, 유지보수에까지 신경썼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수원화성에는 사대문을 비롯해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 시설물의 명칭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글 이종호 / 국가과학자 박사


<출처>네이버캐스트, 2011.12.27

Posted by To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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