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에 대고 리모컨을 누르자 TV방송이 나온다.

전원이 꺼져 있을 때는 LCD(액정디스플레이)를 통해 뒤 벽지가 보이다가 전원을 켜면 화면에 방송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투명TV'가 2020년대쯤 개발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원래 투명한 LCD에 각종 전자회로와 트랜지스터까지 투명하면 유리 같은 투명TV가 가능하다. 핵심은 투명 트랜지스터. 최근 한국 연구진이 잇달아 이 분야에서 개가를 올리고 있어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 최초의 CPU용 투명 트랜지스터

전자제품의 핵심부품은 크게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와 이를 제어하는 CPU(중앙제어처리장치)로 볼 수 있다. 연세대 물리학과 임성일 교수팀은 CPU에 사용되는 트랜지스터를 투명하게 만드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임 교수팀은 관련 연구 결과를 재료공학분야 최고의 학술지인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티리얼스(Advanced Functional Materials)'지 표지 논문으로 10일 게재할 예정이다.


투명 트랜지스터 기반의 TV가 출시되면 벽이 화면으로 대체될 수 있다. 투명 TV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전원을 공급하게 되면 벽이 화면으로 전환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전문가들은 2020년대

투명TV가 출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사진은 투명TV가 개발됐을 경우를 가정한 합성 사진이다.

투명 트랜지스터는 2003년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투명 트랜지스터가 개발됐다. 기존에도 메모리용 반도체로 쓰이는 투명 트랜지스터가 있었다. 하지만 CPU용 투명 트랜지스터는 번번이 실패했다. 임성일 교수는 "모든 연구진이 무기물로 투명 트랜지스터 개발에 매달릴 때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유기물 투명 트랜지스터 연구에 몰두한 것이 성공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투명 트랜지스터 개발의 난점은 표면에 있는 불순물 같은 결함(defect)에 있었다. 결함에는 전자들이 들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활동하지 못하고 묶여 있다. 마치 구멍 속에 공이 들어가 있어서 외부로 나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투명한 트랜지스터를 빛에 노출시키고 구동시키면 빛이 결함 속의 전자를 밀어올려 불필요한 전자가 트랜지스터에 흐르게 되는 것이다. 구멍 속에 물이 들어가 공을 바깥으로 밀어올리는 원리와 비슷하다.


연세대 임성일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CPU용 투명트랜지스터를 개발해 선보이고 있다.

투명트랜지스터는 투명TV, 투명휴대폰을 구현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연세대 임성일 교수 제공

임성일 교수팀은 산화아연 박막과 유기 화합물인 펜타센으로 결함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결함이 없으니 빛 때문에 튀어나오는 전자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투명 트랜지스터가 안정적으로 구동할 수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성과 잇따라

메모리 분야에서도 국내 연구진이 성과를 내고 있다. 작년 12월에는 KAIST 임굉수·박재우 교수팀이 플래시 메모리와 비슷한 투명 메모리 소자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플래시 메모리는 휴대용 저장장치인 USB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USB는 전원이 없어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임굉수 교수팀은 투명 메모리로 산화인듐주석(ITO)과 산화아연을 사용했다. ITO는 터치스크린 휴대폰에 사용되는 물질로 투명하면서도 전기가 흐르는 장점이 있어 투명 트랜지스터 전반에 널리 사용된다. 임굉수 교수팀은 연구 결과를 응용물리 분야 전문학술지 '어플라이드 피직스 레터스(Applied Physics Letters)' 12월호에 게재했다.

투명 트랜지스터로 인한 일상생활의 변화는 컬러TV가 흑백TV를 대체했을 때 생긴 변화 이상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자동차 극장에서 외부의 스크린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차장에서 자동차 앞유리에 영화를 틀어 놓고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투명한 휴대폰 역시 가능해진다.

일본의히타치의 최근 연구결과도 투명 전자제품의 상용화 전망을 밝게 했다. 히타치는 실리콘 반도체처럼 1.5V에서 동작하는 투명 트랜지스터를 개발했다고 작년 12월 발표했다. 히타치는 트랜지스터의 두께를 기존의 10분의 1로 줄여서 구동 전압 역시 수십 분의 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런 투명 전자제품이 상용화되기 위한 가장 큰 난관은 바로 ITO에 있다. ITO의 원료인 인듐이 반도체의 규소만큼 흔하지 않아서 범용적으로 사용됐을 때 공급량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임성일 교수는 "ITO의 기능을 가지면서도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출처> 조선일보, 2009.03.05

Posted by Top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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